정병국, 역습의 리얼리즘 (2008.5 / ArtInCulture)

 

이달승(이하 이) 안녕하십니까. 작업실로 오면서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화가에게 작업실의 정체는 무엇일까’하고 말입니다. 화가의 작업실 혹은 아틀리에를 말하면서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재능, 영감, 창조 등과 같은 무언가 신비스런 분위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창조의 산실, 이 표현은 오늘날 다분히 어떤 이데올로기의 찌꺼기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르네상스 화가들에게 아틀리에는 분명 훌륭한 재능이 발휘되는 창조의 산실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워홀 같은 작가는 아예 자신의 작업실을 냉소적으로 팩토리, 즉 공장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몬드리안의 작업실은 위생적인 건축, 설계, 사무실 정도를 짐작해 볼 수도 있겠죠. 작업의 성향을 염두에 두면 말입니다. 그런데 세잔, 특히 고흐의 경우는 솔직히 말해서 도대체 작업실을 연상할 수가 없습니다. 재능이란 단어를 발음하기가 민망스럽게, 그냥 온몸으로 뒹구는 투쟁의 몸짓만 떠오르니 말입니다. 화가 정병국에게 작업실은 어떤 장소입니까?


정병국(이하 정) 내 작업실은 영화관 같은 곳이지요. 흰색의 대형 화면, 대사와 침묵, 그 곳은 많은 동작들이 오가고 많은 시간들이 엉기었다 사라지고, 피었다가 지는 영화관이죠. 관객이 없는 영화관. 그리고 내가 그 영화관의 감독이 됩니다.


어둠의 침묵 속에 빛이 그림을 그리는 영화관. 그런데 정숙을 어기고 말을 해야 하니, 혹 나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아닐까요? 잠자코 있을 수도 없고, 곤란하네요. 아니나 다를까 화가들은 그림을 두고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나 자신 또한 그림의 완강한 부분들을 말로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자신에 대해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이 자신을 숨기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니체의 충고를 따른다면 이런 종류의 대화라는 것 자체가 작가에게는 썩 좋은 일이 못되지요. 가급적 작업과 관련하여 리얼한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만…. 그래서 리얼리즘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본인은 스스로를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하시나요?

 

리얼리즘을 회화 자체의 문제로

 

진정한 리얼리스트, 뭐 이런 이야기를 많이들 하고 또 듣게 되죠. 하지만 정작 가까이서 본 것은 드뭅니다. 어쩌면 요즘 현실에서는 그 의미 자체가 무의미해진 것도 같습니다. 나는 보이는 것과 진실의 간격에서 리얼리티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은 그 간격을 최소화시켜 보려는 안타까운 노력이라 할 수 있죠. 그렇지만 그 간격은 내 작업이 움직이고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 간격은 지도상에도 없고,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역설적으로 그 곳에 섰을 때 나는 가장 신선한 기운을 맛봅니다.

 

전혀 사실적이지도 않은 것을 두고 리얼리즘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지요. 신선하지 못한 리얼리즘 말이죠. 리얼리즘은 사실을 다루어야 하는데 리얼리즘을 관습적인 문제나 아카데미즘의 문제로 이해하는 게 대부분이죠. 우리 미술 교육의 현실도 그러하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리얼리즘을 자꾸만 솜씨나 재주 정도로 이해하거나, 자기 작품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하고, 그러다보니 구체성이 없는 장식으로 전락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데요.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그림을 통해 진정한 리얼리스트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잘 그리는 사람은 많아도 말이죠.


쉽게 말해서 보이는 외부 세계를 그대로 묘사한 그림 정도로 생각하게 되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잘 그린 그림을 선호한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리얼리즘, 누보 리얼리즘, 하이퍼 리얼리즘 그리고 포토 리얼리즘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계보를 보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연 중에 리얼리즘을 자꾸만 결과의 측면에서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상을 잘 그렸다, 현실을 잘 묘사했다는 식으로 말이죠. 따라서 사회주의 리얼리즘도 마찬가지입니다. 80년대 민중미술은 재주나 구호는 똑같이 리얼리즘을 오해하게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견해는 대상 혹은 현실이라는 원인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고 들어가는 셈이죠. 미술은 주어진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나 현실에 다가가 새로이 보려는 힘겨운 싸움이지요.


사실 사람들은 잘 그린 그림, 흔히 리얼하다고 불리는 작품들 앞에 서서 잘 그렸다 하면서도 정작 오래 머물게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약간의 기술적인 호기심으로 인한 관심은 보이겠지만요. 그림은 결국 보이는 것과 진실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데 그 몫이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예술은 우리 가슴의 박동수에 비해 수세기 늦거나 아니면 거꾸로 우리를 앞지름으로써 언제나 객관성의 야릇한 부족을 야기합니다.


객관성의 야릇한 부족. 그렇죠. 무엇을 잘 그렸다는 점에 비중을 두다 보면 작가가 어떻게 그렸는가에 대한 관심은 소홀해지기 마련입니다. 리얼리즘을 잘 그린다는 기량이나 관습이 아닌 화가가 어떻게 그리는가 하는 회화 자체의 리얼리즘 문제로 다룬 화가가 바로 세잔이죠.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린다는 것, 즉 대상에 대한 감각을 화폭에 실현하는 일이었죠. 그에게 리얼리티(Reality)는 곧 실현(Realisation)이었습니다. 물론 이 실현은 언제나 야릇한 부족을 담고 있고. 그런데 이 야릇한 부족이 주관을 넘어선 객관에 대한 의지라고도 볼 수 있죠. 이러한 의미에서 세잔의 작업은 차라리 과학에 가깝다는 생각도 듭니다. 세잔과 마찬가지로 리얼리즘 문제를 회화 자체의 문제로 제기한 화가는 한국의 경우 겸재 정선이 거의 유일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나름대로 겸재의 그림을 볼 때 현대적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감각은 우리 뒤에 있으면서도 우리를 앞지르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진짜 현대적 리얼리스트라 할 수 있죠. 현대는 언제나 현대입니다. 브뤼겔을 한번 보세요. 그리고 겸재는 흔히 말하는 리얼리즘과는 관계 없는 작가이지요. 우리가 애매하게 사용하는 리얼리즘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진 사람이 겸재의 그림 앞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림 앞에 선 화가의 초상

작업을 보면서 나는 자꾸 화폭 너머로 인간 정병국을 보려고 합니다. 불쾌하지 않으십니까?


불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합니다. 그림뿐만 아니라 농사도 그렇지만, 일 따로 사람 따로일 수가 없죠. 그것은 자루 없는 삽을 말하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일을 하려면 당연히 사람의 손으로 자루를 잡아야겠죠.


인물을 많이 그려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림을 작가의 초상으로 보고 싶다는 뜻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그림은 작가의 초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여기서 초상이란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의 초상은 아닙니다. 작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많은 화가들이 초상화에 몰두했는지도 모르죠.


영화관에 가면 많은 관객이 영화를 객석에서 보는 것 같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화면 속에 들어가 있는 자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관객은 그 영화의 내용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대한 사실보다 자기가 그 내용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를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화가가 자기 그림 앞에 섰을 때 거울 앞에 선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것도 벗고서 말이죠. 작품 속의 많은 인물들이 그런 것처럼요. 선생님과 가까이서 오랜 기간 알고 지냈지만 저는 선생님을 잘 모릅니다. 추측만 할 뿐이죠. 살아 있을 때는 누가 진정으로 자신과 닮은 모습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매우 드뭅니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온갖 추측과 판단이 멈추면서 우리는 그를 다시 만난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진짜 그를 닮은 모습 말입니다. 물건도 그렇지 않나요? 망가지거나 부서지면서 물건이 문득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지 않나요? 그 때의 모습이 사용할 때는 몰랐던 사물의 숨겨진 본모습은 아닐까요? 제가 말씀드린 초상이란 이러한 의미입니다. 닮아 보인다는 뜻이죠. 보이지 않다가 비로소 닮아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본 모습 혹은 리얼리티라는 게 사실은 이처럼 닮아 보이는 모습이 아닐까요? 또한 화가의 눈이란 결국 이렇게 닮아 보이는 순간을 쫓는 눈이 아닐까요? 제가 선생님 그림에서 화가 정병국을 보려고 한다는 의미는 다름 아니라 닮아 보이는 순간을 쫓는 화가의 눈을 보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물은 기능이 소멸했을 때 떠오르는 애잔한 그 모습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진정한 리얼리티는 떠난 후에 남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간격, 그 간격 사이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요. 진정한 리얼리티를 접할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 짧은 순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화가는 그 순간을 증폭시키고 지속시킬 수 있는 감각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지경을 스치는 자리에서 문득 뒤돌아보았을 때의 그 순간이 리얼리티를 엿보는 시간이 아닐까요? 그리고 바깥 모양이 실제와 매우 동떨어진 나머지, 마침내는 지속되지 않는 한 순간의 희열만 느끼고 말긴 하지만요.

 

 

균열과 갈등이 주는 화면의 긴장

객관성의 야릇한 부족이랄까요. 무엇을 찾는 듯 헤매는, 그러면서도 무표정한 모습, 그리고 등을 돌리고 있는 많은 인물들….


무표정한 모습이 가장 리얼리티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리고 등을 돌리고 있는 인물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가끔 예술은 인간이 겪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 겪을 줄 모르는 것만을 예고하는 것 같습니다.


인물뿐만 아니라 그려진 나무나 바위에서도 우리에게 등 돌리며 불쑥 드러나는 그러한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회화의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다소 이론적이긴 했지만 르네 마그리트의 눈이 그러했고, 그리고 몇몇 그림들은 마그리트와 유사한 인상을 주기도 하는데요?


나무와 바위, 구름, 날아가는 새나 땅 위의 동물 그리고 부서진 가구, 버려진 그 무엇들 모두는 나에게 동등합니다.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있고, 어느 공간, 어느 시간이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범신론자이지요. 르네 마그리트는 종교적 시각으로 본다면 무신론자가 아닐까요? 어떤 부분에 있어서 나와 유사점이 있다면 그의 눈엔 모든 사물의 가치가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난 초현실주의자는 아닙니다.


모든 사물을 공평하게 바라보고 또 정겨우면서도 어렵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화가는 범신론자여야 하겠죠. 그런데 선생님의 작품에서는 항상 긴장이 느껴지는데, 그 긴장은 어디서 온다고 보십니까? 부동의 정적 속의 긴장, 뭐 이런 표현도 가능하겠습니다만, 너무 심심하고 추상적이죠.


먼저 타고난 성격이 그렇지요. 그러한 성격은 이미 DNA 안에서 예고되었던 것 같고, 니체의 피안의 세계, 차라투스트라의 목소리를 통해 울리는 인간의 존엄과 고양된 영혼의 모습들이 나에게는 강력한 긴장의 이미지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니체의 생각, 니체의 글은 앞뒤가 없는 순간적 전복의 긴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나 역시 구체적 설명이나 전주가 없는 대상의 느닷없음에 주목하게 되고, 그 때의 긴장을 화폭에 실현시켜 보려고 애쓰죠. 그것은 결국 긴장된 조형 상태를 요구하게 되는데, 나로서는 절제된 화면 구성과 색채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느닷없이 다가오는 대상의 단순한 조형 상태로의 이전이 나에게는 리얼리티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어떤 효과음이나 음악을 배제한, 이미지 그 자체의 리얼리티를 두둔하고 싶습니다. 가장 순수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누벨바그의 영상 미학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쫓고 있는 생각과 드러나는 그림 사이의 균열, 갈등 같은 것은 없습니까? 어떤 예감에서, 혹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하기도 하시는지요.


화폭에 기운을 주는 것이 바로 이러한 균열과 갈등으로 인한 긴장입니다. 악기의 현이 떨며 음색을 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팽팽히 당겨져 있어야 하겠죠. 쫓고 있는 생각이 단순한 관념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형태나 색이기도 하답니다. 존재의 뒤안길과 같은 색의 배경이 펼쳐지면 그 위로 이미지들이, 행복처럼 슬픔처럼 망각 속에 잠겨 있던 간결한 존재의 형태가 어른거리기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만질 수 없는 기억의 저장소에 갇혀 있다 상당한 세월이 흘러, 때로는 다른 엉뚱한 대상과 만나면서, 묻혀 있던 기억은 예기치 않은 새로운 빛깔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균열과 갈등을 해소하기보다는 그것이 온전히 드러났을 때 이루어지는 엄격하고 아름다운 불일치인 이 지점이 오히려 내가 머물고 있는, 아니 머물고 싶은 곳이지요.


펼쳐진 배경은 푸른색이 주된 톤을 이루고 있습니다. 고흐의 푸른색, 마티스의 푸른색, 이브 클라인의 푸른색 등이 있는데, 본인에게는 푸른색의 배음이 어떤 표정, 어떤 울림으로 다가오는지요?


내가 원하는 푸른색이 캔버스에 칠해졌을 때 나는 그림의 반을 그렸다고 생각합니다. 노란색 대비를 통한 반 고흐의 강렬한 블루, 마티스의 청명한 푸른 패턴, 이브 클라인의 색과 빛의 관념적 혼합에 비해서 내 그림 속의 푸른색은 오랫동안 어두움 속에서 또는 은폐되어 있던 장소에서 그 뚜껑을 열었을 때, 만져지듯 다가오는, 어쩌면 색이라기보다는 수많은 기억의 시간들이 새로이 벌이는 밀회의 장소인 듯합니다.


인물들의 포즈는 어색한 경우가 많습니다. 말하자면 멈칫 하는 그런 포즈 말입니다. 그래서 다소 인위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연출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카메라의 앵글에 문득 잡힌 정지 이미지 같기도 하고요. 고전적 포즈와 현대적 영상 이미지의 기묘한 결합 같기도 합니다.


내 그림에는 여러 이질적 요소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고전주의적 엄격함과 낭만주의적 감흥, 미니멀의 단순함, 포스트모던의 불일치 등등…. 어떻게 보면 상반되는 요소들이 공생하는 것 같습니다.


화면은 단순해 보이는데, 상당히 잡다하네요?


그렇습니다. 짬뽕이지요. 미안합니다.(웃음)


사실 그게 매력이기도 하지요. 음악으로 말하면 클래식과 뽕짝, 미술로 말하자면 고전과 간판장이 그림, 정서로 말하자면 낭만의 감흥과 신파조의 감상의 결합이랄까요.


교미라고 할 수 있을까요?


위험하시네요. 씩씩하고 쨍쨍한 교미면 괜찮죠. 그럼 좀 더 위험해지세요.


하하, 자신이 없네요. 그 다음은 성스러움과 음란의 결혼입니까?


다시 니체로 돌아왔네요. 보들레르의 악의 꽃도 그렇고, 그는 예술은 성스러운 매춘이라고 했습니다.

 

대상의 매혹에 눈이 멀다

사실 우리 미술이 전체적으로 너무 감상적이다 보니 기백이 없죠. 시도 그렇고, 너무 감미롭고 여성적이죠. 대중가요도 힘은 없고, 애수의 눈물만 잔뜩 있죠. 또 너무 예쁜 것만 찾고, 꽃그림 좋아하고, 그러다보니 리얼리즘은 잘 그린 그림으로 치부되고요. 나도 앙탈만 부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애수가 호락호락한 감정은 아닌데 말이죠. 술집 작부의 고독도 싸구려는 아니지 않습니까?


애수. 그런데 어떻게 보면 애수의 감정이 예술의 출발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애수, 향수 각각에는 예술의 근원적 움직임에 관련된 울림과 지향이 있죠. 굳이 나눠본다면 서구는 노스탤지어, 한국은 애수 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좌우간 애수가 힘이 되지 못하고 눈물로만 그치고 있다는 게 우리 예술의 서글픈 현주소 같습니다. 박수근에게서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듯 한데요. 아니 보다 엄격히 말해서 문제는 그와는 상관 없이 우리가 그에게서 한국적 애수의 조형적 리얼리티를 향한 치열한 싸움이 있었는가를 질문하기보다는 한국적 정서를 대표하는 국민 작가라는 타이틀로 칭송하거나 서둘러 그 감미로운 설움에 안겨버리고 마는 우리 정서의 나약함이 문제입니다. 매너리즘이지요. 바로 이러한 감미로운 애수의 매너리즘 위에서 ‘접시꽃 당신’ 류의 멜로물이 번성하는 거겠죠. 현실의 어려움은 눈물과는 다르지요. 세잔의 초상화를 보면 그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눈에서 분명 노스탤지어를, 눈을 부릅뜨고 그가 지켜보고 있는 노스탤지어를 느낄 수 있죠. 그런데, 애수가 예술의 근원적 향수로 자라기 위해서는 결국 힘의 문제, 기백의 문제이겠죠. 패기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리얼리즘이 처하고 있는 문제와 동일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작품 중에 대작이 많은데요, 단순히 스펙터클한 효과를 노린 것은 아닐테고, 인물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감각과 관련이 있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나와 그림의 첫 육감적인 만남은 극장의 영화 간판을 통해서입니다. 또 어렵게(?) 극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눈앞에 펼쳐진 하얗고 커다란 스크린, 영화가 시작되기 전의 긴장감과 설레임, 어린 소년의 꿈의 크기만큼 그 스크린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아! 흰색과 어두움의 커다란 출렁임, 다시 영화관으로 돌아왔네요. 작품 제목 중에 ‘밤의 입술’이 있죠. 영화 제목 같네요. 밤의 입술은 작품 전체가 궁극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리얼리티와의 관계에 대한 은유로도 들립니다. 밤의 입술은 추상적이면서도 상당히 구체적인데요. 리얼리티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밤은 공간과 깊이로, 입술은 시간과 속도로 다가오면서 말입니다. 역습의 키스와도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리얼리티는 내가 챙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하는 것입니다. 여인의 입술에 입맞춤하는 것, 밤의 입술에 입맞춤하는 것은 훔치고 빼앗는 것이 아니라 당하는 겁니다. 리얼리즘은 대상을 다루고 제어하는 기술이 아니라 대상의 매혹에 눈이 머는 것입니다. 밤의 입술은 나를 눈멀게 하고 달아나지요. 인생의 리얼리스트, 예술의 리얼리스트 한용운의 노래처럼 말입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밤의 입술, 당신은 악의 꽃이네요. 여하튼 참 좋은 계절입니다. 여기 팔공산 풍경이 그대로 자연 영화관입니다. 세잔이 말하기를 화가는 루브르에 들어가지 말라 했죠. 빛은 밖에 있으니까요. 그래도 밤이 되면 다시 영화관으로 들어가실 거죠? 오늘밤 영화도 ‘밤의 입술’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