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습의 리얼리즘': 혹은 알레고리 회화 (김복기, 아트인컬처 발행인 겸 편집인)

 

1.

3년 전, 미술평론가 이달승은 미술잡지 아트인컬처(2008년 5월호)에 실린 화가 정병국과의 대담에서 󰡐역습의 리얼리즘󰡑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사실상 이 제목 하나로 정병국 작품 세계의 설명이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것은 어느 고급 독자의 실제 코멘트였다.) 나 같이 '제목' 에 목숨 거는 잡지(언론) 편집자의 경우, 이렇듯 짧지만 내용을 송두리째 함축하고 그러면서도 의미의 외연이 활짝 열려 있는 비평 용어를 만날 때면, 마치 황홀경 같은 짜릿한 쾌감에 빠지곤 한다. 나는 지금도 정병국의 작품 앞에 서면, 이 '역습의 리얼리즘'이라는 화두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역습의 리얼리즘. 리얼리즘에 '역습(逆襲)'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역습이란 상대편의 공격을 받고 있던 쪽에서 거꾸로 기회를 엿보아 신속하게 공격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역습이란 틀에 박힌 기존의 상황에서 일탈하려는 변혁의 몸부림이요, 어떤 노림수를 품고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도발적인 전술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습의 리얼리즘'이란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이되 상투성을 벗어난 뭔가 '별난' 리얼리즘, 또는 리얼리즘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리얼리즘을 '뛰어넘는' 작품 세계란 뜻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포스트(Post) 리얼리즘'이란 말을 갖다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나는 이 '역습의 리얼리즘'에서 정병국 예술의 미술사적 계보는 물론이고, 그의 독자적인 예술 게놈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2.

정병국은 자신의 그림을 이야기할 때, 자주 영화를 끌어들이곤 한다. 󰡒나와 그림의 첫 육감적인 만남은 극장의 영화 간판을 통해서다. 또 어렵게(?) 극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눈앞에 펼쳐진 하얗고 커다란 스크린, 영화가 시작되기 전의 긴장감과 설렘, 어린 소년의 꿈의 크기만큼 그 스크린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앞의 대담 중에서) 정병국의 그림을 영화와 매치시키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 요컨대 흰색의 스크린은 대형 캔버스와, 등장인물의 대사(말)는 인물이나 동물 같은 이미지로, 소리 없는 침묵의 영상은 푸르거나 검게 전개되는 색채 배경으로…. 그렇다. 정병국의 작품에는 영화의 한 장면 혹은 연극 무대의 세트 장치를 떠올리는 조형어법이 구현되어 있다. 화가 정병국은 수많은 이미지들과 시간의 엉김, 그 생성과 소멸의 시나리오를 '색채와 이미지로 뒤덮인 평면' 그림으로 그린다. 그리하여 정병국은 작품에 등장하는 저 푸른 지평선, 시간을 뛰어넘는 공간의 분계선 속으로 끝없이 이야기를 밀어 넣는다. 3차원 영상의 2차원 평면으로의 전이. 이미지와 시간의 기묘한 '역습'이 아닐 수 없다.

 

정병국 그림에 드러나는 형상이야말로 '역습'의 수사와 아주 잘 어울린다. 언제나 그 형상들은 아무런 전주곡(前奏曲)도 없이, 어떤 구체적인 예고나 사전 브리핑도 없이, 그냥 느닷없이 우리의 눈을 덥석 덮친다. 그 어떤 욕망에 허기진 듯한, 그 욕망을 찾아 헤매는 듯한, 등을 돌린 뒷모습이거나 웅크리거나 아예 몸체가 날아간 투명인간 같은 형상들, 저 표정 없는 담담한 인물들. 나무와 바위, 구름, 허공을 날아가는 새 그리고 부서진 가구와 흩날리는 꽃들…. 인물들은 모두가 멈칫 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마치 배우가 연기하는 한 순간의 동작을 카메라 앵글로 포착한 이미지와도 같다. 그 이미지들이 지평선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 형상들이 때로는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이 '역습'의 포즈에서 우리는 또 다른 세계의 예감을 찾아 나설 수 있다.

 

정병국이 형상을 화면에 요리하는 구성 방법 또한 아주 극적이다. 머리나 신체 부위를 과감하게 화면에서 잘라버리는 클로즈업 수법이 불쑥 나타난다.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배경을 극도로 단순화시켜 주제 이미지는 광고 효과처럼 임팩트가 강하다. 그가 대형 화면에 인물 하나만 덩그러니 그려 놓아도 '그림이 되는' 이유도 이 심상치 않은 화면 구성의 힘 때문으로 보인다. 꼭 대작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그의 작품은 '시각적인 그럴 듯함'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정병국의 작품은 스펙터클하다.

 

정병국의 색채는 몇 가지로 절제되어 있다. 이 지독한 금욕 중에서도 으뜸으로 빛나는 색채는 블루(Blue)다. 그는 회색이나 검정색도 즐겨 쓴다. 정병국은 자신이 원하는 푸른색을 캔버스에 제대로 얹혔다고 생각할 때, 그림의 반은 완성한 셈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그의 작품에서 블루에 대한 발언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피카소에서부터 마티스와 이브 클라인, 그리고 우리의 김환기나 이우환에 이르기까지 '블루의 미술사'는 찬란히 빛난다. 블루는 기본적으로 대상 색이 아니라 정신의 색이요, 명상의 색이다. 정병국 그림의 블루는 오랜 시간 어둠, 침묵, 음모, 비밀 속에 갇혀 있던 사상(事象)들이 마치 영화나 연극에서처럼 인공조명을 받고(페이드인(Fade-in) 혹은 페이드아웃(Fade-out) 상태),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며 우리를 어루만지듯 다가오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정병국의 블루는 자신이 고백한 대로, '색이라기보다는 수많은 기억의 시간들이 새로이 벌리는 밀회의 장소'다. 요컨대 블루는 '기억의 창고'요, '존재의 뒤꼍' 이라고 해도 좋다.

 

3.

푸른 음조로 물든 '존재의 뒤꼍'에는 언제나 이질적인 것들이 팽팽한 긴장과 갈등으로 출렁이고 있다. 낮/밤, 남/여, 앞/뒤, 겉/속, 성/속, 정지/움직임, 영원/순간, 인공/자연, 원시/문명, 실상/허상, 삶/죽음…. 이질적인 조형요소들은 이중 혹은 그 이상의 문맥을 만들어내고, 그 곳에는 표면적 의미와 숨은 의미의 차이, 의미들의 역전 등과 같은 알레고리가 움직이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시각적인 그럴 듯함'으로 말할 수밖에 없기에, 정병국에게는 모든 것이 알레고리가 된다. 그리하여 저 대개념들의 충돌은 그의 작품 가운데 혼성과 공생의 미덕으로 오롯이 살아 있다. 이러한 불일치 혹은 어긋남의 엇박자가 일구어내는 작품 세계. 이것이 바로 정병국의 '역습의 리얼리즘'이 아니겠는가. 알레고리의 충동으로 물든 리얼리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