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입술 (이달승, 미술평론가)
밤에는 물고기가 물 밖으로
달빛을 때리러 나온다.
김수영
회화의 죽음을 이야기하더니, 어느새 회화의 부활을 들먹인다. 하지만 회화를 죽이고 살리는 우리의 야단스런 호들갑에도 회화는 여전히 침묵한다. 회화는 죽은 적도 되살아 난 적도 없다. 회화는 그 권한을 박탈당한 적도 탈환한 적도 없다.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는 회화에는 나이가 없다. 시류와 경향과 기교와 컨셉에 아랑곳 않는 그 곳 회화에는, <날짜 없는 시간>을 사는 지향만이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침묵이 일러주는 지향. 침묵이 이끄는 그러한 지향을 일컬어 우리는 회화의 모험이라 부른다.
회화의 모험이란 다름 아닌 눈의 욕망이 나아가는 여정을 말한다. 그런데 눈의 욕망 즉 보려는 욕망은 그리려는 욕망과 보이지 않는 숨소리를 사이에 둔 동일한 욕망이다. 낯간지러운 감상이라는 비웃음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리움이라는 단어의 울림을 다시 떠올려보자. 그리움이란 아직 만나지 못한 것 혹은 이미 잃어버린 것이 남긴 빈자리를 지켜보는 애석함을 말한다. 회화는, 그림은 원래가 그렇게 그리움의 오랜 연인이었다.
일찍이 로마의 플리니우스는 그림이 품은 그리움을 이렇게 적고 있다. “회화의 원리는 선의 도움을 빌어 인간 그림자의 윤곽을 뒤쫓는 데 있다.”고. 여기서 그림자의 윤곽이란 회화가 머물 수밖에 없는 자리를 말하고, 뒤쫓는 움직임은 회화가 지날 수밖에 없는 시간을 말한다. 그림자의 윤곽을 뒤쫓는 움직임, 헛된 추적의 위험부담마저 감수해야하는 긴장, 이제 그리움은 나른한 감상이 아니라 긴박에 휩싸인 의지가 된다. 감상으로서의 그리움이 아닌 의지로서의 그리움. 이것이 바로 화가 정병국이 그림을 그린다는 그 이유만으로 견뎌내야 하는 그리움 즉 의지이다.
그런데 회화에서의 의지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관철해야한다는 의미에서의 의지가 아니라, 화가가 나아가는 걸음걸이의 그 순수한 움직임 가운데 뜻과 힘이 새겨지는 의지이다. 가령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 가는 가운데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비로소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자신을 맡길 때 그림은 시작된다. 그러나 화폭이 예감의 손길을 받아줄지 뿌리칠지 화가는 알지 못한다. 일언의 약속도 없는 길을 나아가는 행인의 간곡한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그 간곡함에도 불구하고 예감은 언제나 미결의 포우즈로 유예되고 만다. 간곡함이 도리어 덫이었던가, 화폭의 인물들은 도대체가 정처(定處)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정병국의 그림 앞에 서면서 우리가 낯설고 난처(難處)하여 끝내 설운 느낌을 지우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못내 조급하다. 화폭 앞에서의 낯설음에 서둘러 의미를 추궁한다. 난처함을 벗어나려는 조바심에 그림의 제목을 곁눈질해보기도 한다. 그림과 제목 사이에 미끄러지는 아슬아슬한 엇박자 탓인지, 제목이 낯설음을 도리어 더해준 탓인지, 우리의 낯설음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은근한 듯 옹색한 제목은 반갑고 고마운 격려가 되기는커녕 곤혹의 그늘만 키우는 야속한 참견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우리는 화폭 앞에서 반드시 의미를 밝혀내야 한다고 부당하게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여기서의 낯설음은 안이하고 안락한 의미에 대한 기대의 좌절이 안겨주는 난처함 때문은 아닐까. 실제로, 우리에게 등 돌린 채 어두움을 향하고 있는 인물의 시선이 막막(漠漠)한 어두움의 심연을 향수하고 있는지 막막(寞寞)한 어두움의 장벽을 마주하고 있는지 우리로서는 요령부득이다. 어두움 속에 잠겨 푸르름의 깊이를 바라보는 인물은 우리의 갖은 호기심을 거절하면서 종내 말없는 의문의 검은 실루엣만 남긴다.
얼른 보기와는 달리 정병국의 그림은 고독 우수 방황 등과 같은 내면의 갈등이나 동요와는 무관하다. 착잡한 심리적 분장(扮裝)을 지워버린 화가의 시선은 이미 어떠한 내면의 웅성거림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인물의 심정적 움직임에 대한 궁색한 짐작이나 구차한 수다를 포기하게 하는데 그 매력이 있다. 짐작과 수다를 삼가면서 우리는 인물을 둘러싸고 드러나는 화면의 표정, 화면의 정경(情景)에 다가서게 된다. 무례하리만큼 대담한 화면, 인색하리만큼 절제된 색조 그리고 무모하리만큼 간결한 형태는 서글프리만큼 헐벗은 정경을 낳고 있다. 말 못할 구슬픈 수모와도 같은 푸르른 어두움에 잠긴 그 헐벗은 정경은 아무런 변명이나 수사 없는 화가의 숨은 순진성을 드러내며 힘을 얻고 있다. 화가의 순진하고 단순한 시선은 일찍이 그리운 세계와의 긍지있는 해후를 실의 속의 초조처럼 꿈꾸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움을 먹이 삼아 만남을 꿈꾸는 화가의 눈길은 내면을 뒤돌아보는 시선이 아니라 바깥으로 불려나가는 시선이다. 화가의 시선은 머리로 가늠하거나 심정으로 헤아리는 시선이 아니라 몸과 함께 나아가는 시선이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서 화폭이란 적정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세계를 옮겨 담는 장소가 아니라 몸이 미끄러져 들면서 함께 움직이는 자리이다. 화가가 향하던 기약 없던 세계, 어쩌면 그 세계는 언제나 화가 곁을 맴돌았던 알 수 없는 은밀한 유인(誘因)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상대적으로 거대한 기념비적 육체는 그가 인물과 거리를 취하기를 꺼리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령 모델을 바라볼 때 그의 시선에 읽혀지는 것은 모종의 심리적 편향에 따른 외관의 인상보다는 모델의 순간적 포우즈에 그의 시선을 빼앗기면서 함께 휘청거리거나 출렁이는 몸의 움직임이다. 이러한 인물을 대하는 심리적 거리(인간에 의해 계산된 인위적이고 의미론적인 거리)의 소멸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희미하고 허약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하여 그가 그린 인간은 사유하는 창백한 인간이 아니라 낯선 장소에서 만난 원초의 몸뚱이와도 같다. 아마도 그는 인물을 관조하기보다는 인물의 몸뚱이에 잠겨있는 침묵의 무게를 실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침묵의 무게를 통한 세계와의 소통에 대한 염려는 형상의 외관적 차이와 구별을 떠난 화면의 조형적 요구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정병국의 화폭에는 언제나 푸르름이 가득하다. 화면 가득한 푸르름은 어두움과의 비밀스런 공모로 텅 빈 정적의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 그런데 침묵의 무게로 일어서는 형상들은 그 자체의 부피로 화면을 과도하게 채우면서도 결코 정적의 공간을 손상시키지 않고 있다. 그 소리 없는 함성의 흔들림으로 파도는 바위를 닮고, 질료의 그 어두운 부동의 반짝임으로 나무는 바위를 닮고, 정오의 적막 속에 우뚝 선 그 볼륨의 반란으로 사람은 나무를 닮고... 이처럼 형상들 사이의 공명의 충만함에도 화면에 깃든 적막은 여전하다는 데 정병국이 다다른 조형 세계의 미덕이 있다. 그런데 충만과 공허의 일치는 기어코 몸으로 맞이해야하는 감각의 밀도이다.
침묵의 무게, 그것은 날짜 없는 시간, 낯선 장소에서 나의 의식이 침묵의 몸으로 잦아들면서 나의 눈이 아닌 너의 몸에서 만나는 세계이다. 의식이 재촉하는 분별의 소란이 가실 때, 세계는 침묵 속에서 우리가 미처 눈치 채지 못한 그 고유의 말들을 우리 몸에 새기기 시작한다. “밤이면 고요 속에 더 한층 아름답게 이슬에 젖는 꽃처럼”, 꿈 속 피안에서 밀려드는 소리 없는 파도의 벅찬 함성처럼. 하지만 아름다움과 감동은 자칫 우리의 주책스런 감정이입이기 쉽다. 불타는 장미를 바라볼 때 꽃만 태울 뿐 우리의 몸을 태우지 않으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밤에도 꽃은 꽃피우지만 우리를 흔들어 깨우지 않는다. 밤의 안락과 밤의 휴식을 포기하기엔, 우리에게 밤은 너무도 상냥하고 다정한 정처였다. 하지만 밤 속에 밤의 깨어남이 있듯이, 침묵의 밤 속에서 깨어난 세계는 이윽고 우리에게 위엄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오해는 말자. 위엄이 강제와 억압과는 다르다는 것을 화가는 알고 있다. 차라리 화가에게 위엄은 우리가 묻지 않고 눈감았던 세계의 숨은 매혹이었다. 세잔(Cezanne)의 검푸른 소나무는 우리를 비굴하게 만들지 않고 우리를 압도하는 알 수 없는 매혹 앞에 불러 세운다.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며 밀려드는 밤바다의 얼굴. 그 강압 않는 호소, 말없는 명령으로 침묵의 위엄은 우리에게 밤이 밤의 창을 두들기듯 밤의 입술로 다가온다.
멀어져가며 밀려드는, 숨기면서 드러나는, 사라지면서 떠오르는 세계의 얼굴, 그 침묵의 호소는 결코 저 먼 곳의 은총이 아니다. 언제나 우리를 빠져나가면서도 우리로서는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고단한 생활에 드리운 그림자의 희롱. 사라지면서 드러나는, 아니 사라졌기에 비로소 드러나는 달콤한 듯 쓰라린 기습 같은 환영. 아이구야, 한여름의 번갯불 한 방에 내 눈이 멍든 것, 왠지 모르지요?
정병국의 회화는 바로 이 잠입의 장소, 기습의 시간을 엿보고 있다. 만나지 못한 것이 이미 잃어버린 것이 되는 난처하고 설운 미심쩍은 시간, 밤의 입술에 놀아나는 정병국의 그림은 정적 속의 교란으로 우리를 부추기는 것만 같다. 그러나 도발과 우아(優雅)의 입맞춤이 마네(Manet)가 피할 수 없었던 회화의 그리움이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프랑스 작가 조르쥬 바따이유는 마네의 그림을 도발적 우아라 이름하였다). 밤의 입술은 모순을 불러 세워 다그치는 낮의 취조에 미련도 없다. 밤과 낮, 원시와 문명, 신화와 세속, 고전과 신파, 심각과 장난, 품위와 경박, 생활과 환영, 이 모두가 서로를 잠입하는 교란스런 미결의 어두움에 화가 정병국은 홀로 몸을 적신다. 그리고 모순이 잊혀지며 추억이 될 때, 밤의 꿈속에 피어오르는 회화의 그리움을 그는 회한으로 삼킨다.
아, 그런데 밤의 입술 너는 아량인가 기만인가? 화가는 혹 만날 수 있을까, 밤 속에 홀로 선 소년을. 어둡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홀로 선 소년은 알고 있을 테지. 땅에 피어나면 꽃이 되고 하늘에 떠오르면 별이 되는 것이 바로 소년의 꿈이라는 것을. 함께 달리며 꿈꾸는 우리 모두의 염원이라는 것을.
‘Les lèvres dela nuit’ | Lee, Dal Seung / Crtique d’art
La nuit venue
Energeant hors des eaux
Les poisons fouettent les rayons de la lune
Kim, Soo Young
A peine qu’on entend parler de mort de la peinture, déjà on entend murmurer des propos sur la resurrection de la peinture. Cependant, demeurant en dehors de vaines precipitations verbales, la peinture garde comme de toujours osn mutisme. Jamais elle n’a connu la resurrection ; jamais elle ne s’est vue dépossédée de son pouvoir, pas plus que jamais elle n’a repris son pouvoir. N’ayant ni fin, ni commencement, la peinture n’a pas d’âge. En tant que lieu indifferent aux courants, aux tendances, aux techniques comme aux concepts, la peinture est le lieu où se trouve seule la resolution de vivre le temps sans date. Une telle resolution annoncée at conduit par le silence, nous l’appelons l’aventure de la peinture.
L’aventure de la peinture ne signifie pas autre chose que l’itinéraire que trace le désir de l’oeil. Le désir qui aspire á voir respire. Il respire en tant que désir de peindre. Rappelons ici un mot qui résonne apparemment comme l’ecpression de sensiblerie. Laissons résonner tout de même ce mot de nostalgie. Le désir nostalgique observe. Il observe comme dans le regreat le vide engendré tant par ce qui n’est pas encore rencontré que par ce qui est perdu.
De ce désir nostalgique qui traverse la peinture Pline l’Ancien dit : “le principe de la peinture consiste à poursuivre à l’aide de la ligne le contour de l’ombre de l’homme”. Par le contour de l’ombre se désigne le lieu où la peinture se condamne à se situer ; par le movement de poursuite se désigne le temps que la peinture se condamne à vivre. Le désir nostalgique qui se traduit en une poursuite du contour de l’ombre, désir qui est aussi tension même en tant qu’il assume le risqué d’une vaine poursuite, n’est déjà plus d’un sentimentalism langoureux, mais d’une volonté tendue.
La volonté dans la peinture ne s’entend certainement pas dans le sens de ce qui impose, exige l’accomplissement. Elle s’affermit, se renforce à raison de l’abandon à l’expérience de la peinture. Peindre, ce n’est pas reproduire ce qu’on a envie de peindre, c’est livrer au presentiment qu’on rencontrerait peut-être, en poignant, ce qu’on a vraiment envie de peindre. Auatant dire que la peinture commence là où on se livre à ce pressentiment d’une heureuse rencontre. Seulemnet, le peintre ne sait si la toile accueillera ou repoussera la main dirigée par ce presentiment instat. Mais vers où se dirigent les pas d’un passant qui, instamment, cheminent sans promesse d’acheminement? Malgré l’instance qui le pousse en avant le presentiment finit toujours par se suspender en une pose inachevée. Sans savoir où se fixer. Ce qui fait que devant les toiles de Jung, Byung Guk nous nous sentons nous-mêmes dépaysés, mal á l’aise.
Sans doute exigeons-nous injustement des toiles un sens, un éclairement. Le dépaysement même proviendrait sans doute de l’attente décue d’un sens clair et rassurant. En effet nous sommes privés de toute possibilité de savoir si le regard du personage qui, nous tournant le dos, fait face à l’oscurité de savoir si le regard du personage qui, nous tournant le dos, fait face à l’obscurité est imbu de la nostalgie pour labîme de l’obsurité ou affronte la peur de l’obscurité. Le personage qui, plongé dans l’obscurité, regarde le fond du bleu n’est pas accueilli à égard de notre curiosité dans sa noire silhouette muette qui nous interrogee.
La peinture de Jung, Byung Guk est indifférente, contrairement à son apparence, au conflit ou à l’agitation intérieure, tells que solitude, errance, mélancolie. Dénudé de tout maquillage psychique, le regard du peintre ne fait attention à aucun remous intérieur, Tel est l’attrait de ses toiles : elles ne nous forcent pas à des suppositions pusilanimes sur les mouvements psychiques des personnages. Des jeux verbaux mis à l’écart, nous nous rapprochons de la physinomie de la toile qui enveloppe les personnages : surface d’un audace orgueilleux, couleur d’une retenue excessive, forme d’une simplicité périlleuse. Tout ceci donne lieu à une scéne d’un dénuement affligeant. Cette scène dénuée, sombrée dans une obscurité bleue pareille à une honte triste inavouable, laisse voir l’ingénuité cachée du peintre. Si un tel dénuement est aussi une force, c’est que le regard ingénu et simple du peintre rêvait depuis longtemps au moment de retrouvaille.
Le désir nostalgique éveille le silence. Il éveille pour ainsi dire le silence nocturne. Dans les toiles de Jung, Byung Guk le silence se traduit tant par la figuration des personnages que par la recherche plastique du fond. Face au mod‘èle, le regard du peintre est aux prises avec le movement du corps qui chancelle ou nodule. La suppression de la distance psychique à égar4d du modèle rend le corps parlant dans le langage de l’animal, le langage primitive qui, échappant à tout commentaire, nous enjoin de nous taire. D’autre part le silence souléve pur le peintre l’interrogation portant sur l’exigence plastique de la toile. A cette interrogation les toiles de Jung, Byung Guk répondent par le bleu qui les remplit. Le bleu s’ouvre, comme par une conjuration secrete avec la nuit, sur un espace silencieux oú s’éveillent les paroles insoupçonnées : tout comme les poisson qui, la nuit venun, emergent hor des eaux pour fouetter les rayons de la lune.
Le silence nocturne est en effet une injunction. A l’écoute de cette injunction, tout deviant imposant, tel ce pin bleu-noir de Cézanne qui nous jugule. Cette injunction dissimule en elle un attrait. Ou plutôt elle annonce, laisse pressentir un attrait comme les lèvrs de la nuit. Et cet attrait n’est pas seulement de l’ordre esthétique mais aussi de l’ordre moral comme ce pin de Cézanne qui nous défie dans son allure fière et imposante. Le baiser des lèvres de la nuit est aussi sans doute provoquant. Heureuse provocation pour ceux qui s’y soumettent. Et seuls ceux qui s’y soumettent connaissent le goût de ce baiser. Ce que nous appelons l’expérience artistique, qu’est-ce, si ce n’est justement connaître le gout de ce baiser.